세 자매 농법
삼 주 전에 내린 눈이 이제야 녹기 시작한다. 이곳 북버지니아에 와 산 지 25년이 지났지만, 이번처럼 눈과 한파가 함께 몰려와 얼음 왕국이 된 적은 처음이다. 폭설이 내린 후 급격히 떨어진 기온으로, 온통 얼음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. 1월 말에 생일인 친구의 생일 모임을 2월 중순에서야 갖게 되었다. 지난 12월 모임 때 잊고 전해주지 못했던 씨앗을 챙겼다. 내 씨앗 상자를 열어 한국 토종 호박과 콩 씨앗을 작은 봉지에 나눠 담았다.
발렌타인데이(14일)와 병오년(붉은 말의 해)가 시작되는 설날(17일)이 연이어진 주말 저녁이어서인지 태국 음식점인 동남아 식당 안엔 사람들로 가득 차 시끌벅적했다. 친구들은 이미 와 모두 자리에 앉아 나를 맞이했다. 텍사스에서 이곳 북버지아로 이사 온 후 몇 해 지나 교회 가족단위 모임에서 만난 이들로 어느새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네 쌍의 부부가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. 때론 남자끼리 만나 술모임을 하기도 하고 여자끼리는 꼭 생일을 챙겨 만난다. 여자 넷의 생일이 겨울, 봄, 여름, 가을에 걸쳐 있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은 볼 수 있어 그간의 안부와 소식을 나누며 정겨운 시간을 보낸다.
그렇게 맛있는 음식과 화담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씨앗을 나눠주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야 생각이 났다. “호박과 콩 씨앗과 함께 옥수수 씨앗도 함께 가져왔어야 했는데… 세 씨앗을 함께 건네며 꼭 세 자매 이야기도 해줬어야 했는데…”
다른 모임에 갔다가 저녁 모임에 늦어 급히 상자 맨 위에 놓인 두 씨앗만 급히 챙겨 온 것이다. 이로쿼이(Iroquois)족과 체로키(Cherokee)족을 비롯한 북미 원주민들은 옥수수, 콩, 호박을 함께 재배해 이를 '세 자매(Three Sisters)'라 부른다. 옥수수는 곧게 서서 지지대가 되고, 콩은 옥수수 줄기를 덩굴로 감싸안아 강풍 속에서도 옥수수가 버틸 수 있도록 구조적 안정성을 제공한다. 또한 콩은 질소 고정(窒素固定, nitrogen fixation)을 통해 토양에 질소 공급을 함으로써 다른 자매들을 먹여 살린다. 옆으로 넓게 퍼지는 호박의 큰 잎은 살아있는 덮개(mulch) 역할을 하여 토양의 습기를 유지하고 잡초가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, 줄기의 따가운 가시는 해충을 쫓아내 콩과 옥수수를 지킨다.
(출처:위키피디아)
식물들이 서로를 보완하여 건강한 정원 생태계를 만드는 이런 농법을 '혼작(companion planting)' 혹은 ‘복작(複作, polyculture)’이라 한다. 또 다른 세 자매로 토마토, 바질, 메리골드를 들 수 있다. 이들을 함께 심으면 바질은 토마토가 자라는 동안 열매의 풍미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, 향기로운 가림막을 형성해 해로운 곤충을 막고, 메리골드는 토마토가 약한 가루이(whiteflies)를 퇴치한다. 이 외에도 당근과 양파를 함께 심으면 양파가 당근 파리의 공격을 막고, 양배추를 마늘과 딜과 함께 심으면 딜은 양배추벌레를 방제하는 기생벌을, 마늘은 다이아몬드백 나방을 쫓아 양배추가 건강히 자란다.
정원의 화초도 제 홀로 보다 함께여야 더 건강하고 크고 아름답게 살 수 있게 지어진 것이다. 이 생일 모임은 네 자매 같은 친구다. 작년 여름 환갑이 된 왕언니부터 올해 환갑을 맞이하는 말띠 언니, 두 해 뒤 환갑이 될-겨울에 태어난 오늘의 주인공, 그리고 막내인 나. 첫 환갑을 맞이한 왕언니의 생일 축하를 위해 함께 뉴욕에 갔을 땐 활달한 말띠 언니가 미스코리아나 각종 시상식에서 우승자가 차는 듯한 반짝이는 왕관과 어깨띠를 가져와 환갑 언니가 이를 차고 사진을 찍었다. 앞으로 대를 물려 모두 이렇게 환갑 사진을 찍을 수 있게 잘 보관하겠다 했다.
돌이켜 보면, 많은 관계 속에서 내가 옥수수가 되어 누군가 기꺼이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준 때도 있고 콩이 되어 연약한 몸을 누군가에게 의지해 삶의 언덕길을 오른 때도 있다. 강해 보이는 옥수수도 콩 줄기가 휘감아 올라가지 않고 홀로 서 있으면 폭풍에 쉬이 꺾일 수 있다. 약할 때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까 염려해 홀로 주저앉고 싶을 때 예쁜 꽃을 피우는 콩 줄기를 기억하리라. 내가 받은 지지를 잊지 않고 감사와 봉사, 사랑이라는 '질소'를 되돌려줌으로써, 내가 기댄 기둥이 나의 존재로 인해 더 풍요로워지게 해야 할 것임도 잊지 않는다. 다음 만날 땐 꼭 옥수수 씨앗도 건네주리라는 것도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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